
기록적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더웠던 8월이다. 지난 호에서 폭염과 불평등을 다루고 나니 에어컨 리모컨이 예전 같지 않다 — 한 번 누를 때마다 의식이 개입하는 통에, 순간순간 내 인내심과 사투를 벌였다. 그런 8월도 흘러가고 있다. 더위도 함께 사그라드는 기색이다.
8월은 휴가의 계절이기도 하다. 다들 다녀오셨는지? 나는 '휴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어디로 이동하지는 않았지만, 7월 말부터 줄곧 휴가 같은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물론 일은 하면서. 이렇게 쓰는 시간을 휴가라고 명명하면 그만이니까.
고백하자면 나는 타인과 보내는 시간이 에너지를 가장 빨리 방전시키는 부류의 사람이라, 누군가와 시간을 — 그것도 낭비에 가깝게 —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데 곰곰이 보면 저 문장은 결과론이다. 누구도 시간을 낭비하려고 사람을 만나지는 않으니까. 순서를 뒤집어야 한다.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면서도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 — 그 자체가 행복의 전제 조건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혼자다. 그런데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고들 한다. 이 역설의 두 문장 사이 어디에 무게중심을 두어야 하나. 고민할 것 있나 — 독립적인 내가 사회에서 내 몫의 역할을 하고, 넘치는 능력은 나누고, 모자란 부분은 도움을 받는다. 그렇게 플러스마이너스 제로가 되는 것이 인생이고, 어쩌면 그 제로가 가장 안정적인 상태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기준은 절대적이지도 정량적이지도 않아서, 그냥 내 기준에 맞으면 된다. 너무 어렵게 살지는 말자.
다만 하나는 권하고 싶다. 걱정과 불안은 행복이 빠져나간 빈틈으로 들어온다. 그러니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보시기를.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함께 있어도 좀이 쑤시지 않는 사람이라니. 이번 호 특집은 바로 그 어려운 일을 아예 마을 단위로 해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은퇴하기 전에 이웃을 만나, 취미와 밥상을 낭비하듯 나누며 사는 북유럽의 집들. 다음 장부터 함께 걷는다. — 편집장 박지민
지난 호의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질문 하나를 걸어 두었다. "내 삶을, 공유할 수 있는가." 이번 호는 그 질문을 받아 든 사람들을 찾아간 기록이다. 은퇴하기 전에 이웃을 만나고, 밥상과 취미를 함께 쓰고, 그렇게 만든 공동체 위에 집을 올린 북유럽의 마을들 — 스웨덴과 핀란드의 두 집, 그리고 덴마크의 442개 마을을 공식 기록으로 따라 걸었다.
문법은 지난 두 호와 같다. 사람의 '마음'을 탓하기 전에, 그 마음이 놓인 '조건'을 들여다보는 것. 돌봄을 개인의 효심이나 가족의 희생으로 미루기 전에, 이웃과 제도가 그 무게를 나눠 드는 설계를 살펴본다. 무거운 근거는 이번에도 연구소 보고서가 지고, 잡지는 그 마을들의 저녁 식탁을 가볍게 산책한다.
이번 호의 산책로도 조금 넓어졌다. 공간이 사람을 회복시키는 순간들을 걷는 「스눕독의 여행기」가 새로 문을 열고, 아시안게임의 계절을 맞아 특별 코너 「빨간 호박의 클라이밍」이 벽을 오르는 사람들의 세계를 안내한다. 휠체어 파일럿 이재학 님의 특별기고는 콜롬비아의 하늘에서 도착했다. 그리고 창간호부터 함께 걸어 온 「일본 미술기행」은 이번 호 론 뮤익전으로 3회의 여정을 완결한다 — 짧은 연재를 아껴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여름의 끝에서, 부디 이웃과 명랑하게 읽어 주시기를. — 발행인 박지민
| 면 | 코너 | 제목 |
|---|---|---|
| 02 | 편집장 왈 ② |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사람 — 여름의 끝에서, 행복의 전제 조건 |
| 04 | 특집 기록으로 걷다 | 북유럽 사람들은 어떻게 함께 사는가 — 여는 글 |
| 05 | 특집 1부 · 스웨덴 | 길 떠나기 전 마지막 한 잔, 페르드크네펜 |
| 07 | 특집 2부 · 핀란드 | 마지막 전력질주, 로푸키리 |
| 09 | 특집 3부 · 덴마크 | 외로움을 나라의 일로 다루는 법 + 「이 집은 누가 지었나」 |
| 11 | 특집 에필로그 | 숫자로 보는 함께 살기 — 그래서, 우리도 해볼까요? |
| 12 | NEW 스눕독의 여행기 ① | 공간복지, 회복의 길 — 서울로 7017에서 뉴욕, 그리고 다시 서울로 |
| 15 | 명랑 건강 ② | 골프엘보우 정복기 |
| 18 | 일본 미술기행 ③ 완결 | 실물 크기는 없다 — 론 뮤익, 모리미술관 + 시그니처 도감 |
| 20 | 건축 산책 ② | 엘리베이터를 타는 미술관 — 모리미술관과 롯폰기 힐스 |
| 21 | 부리의 명랑음악당 ② | 음표에 숨긴 이름들 — 슈만의 아슈, 브람스의 아가테 |
| 23 | 맥시멀리스트의 방 ② | 가장 수고로운 필기구를 위한 변명 — 몽블랑 작가 에디션 · 조너선 스위프트 |
| 24 | 월간 집밥연구소 ② | with 토마토 — 입맛 없는 여름, 입맛 살리는 다섯 접시 |
| 27 | 명랑 뷰티 ② | 메마를 틈 없이 — 수분 레이어링 |
| 28 | 특별 빨간 호박의 클라이밍 | 스포츠클라이밍, 이것만은 알고 보자! — 아시안게임 관전 가이드 |
| 30 | 특별기고 이재학 | 휠체어 + 패러글라이더 = 바람 앞에서는 중력도 평등하다 |
| 32 | NEXT | 다음 호 예고 · 판권 |
지난 호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물었습니다. 내 삶을, 공유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웨덴에서는 스톡홀름의 어느 조합원들이 이 질문에 답하는 데 6년을 썼고, 핀란드에서는 헬싱키의 한 협회가 아예 집을 지어버렸으며, 덴마크에서는 이 질문에 답한 마을이 — 2025년 확인된 것만 — 442개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특별한 이상주의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은 자녀를 독립시킨 보통의 중년이었고, 출발점은 소박했습니다 — 나이 드는 일을 혼자 감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
이번 호는 그 사람들의 일상을 기록으로 따라 걷습니다. 평일 저녁의 스웨덴, 화요일 오후 2시의 핀란드, 그리고 442개 마을의 덴마크. 걷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보일 겁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지은 것은 벽도 지붕도 아닌, 저녁을 함께 먹을 이웃이었습니다.
SVERIGE · 평일 저녁의 공동 식당
평일 저녁이면 스톡홀름 쇠데르말름의 7층 벽돌 건물 1층 식당에 사람들이 모입니다. 오늘 저녁을 차린 건 여섯 개 조리팀 중 하나. 30인분에서 많게는 50인분까지, 이번 주 내내 이 팀의 몫입니다. 다음 주면 다른 팀이 앞치마를 두릅니다. 한 사람에게 돌아오는 당번은 6주에 세 번의 저녁 조리 — 그 대가로 나머지 저녁은 차려진 밥상에 앉기만 하면 됩니다.
이 집의 이름은 페르드크네펜(Färdknäppen). 스웨덴어로 '길 떠나기 전 마지막 한 잔'이라는 뜻입니다. 방 한 개에서 세 개짜리 아파트 43호에 쉰 명 남짓이 삽니다. 쉰 살부터 아흔이 넘은 사람까지. 입주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들었을 것, 그리고 열여덟 살 미만의 자녀와 함께 살지 않을 것. 아이를 키우는 시기가 끝난 사람들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새 입주자를 뽑을 때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젊은 쪽을 우선합니다. 모두가 같이 늙어버리면 공동체도 같이 늙기 때문에, 나이의 층을 일부러 섞는 겁니다.
건물 면적의 10분의 1이 모두의 공간입니다. 50인용 식당과 큰 부엌, 도서실, 목공실, 세탁실, 사우나, 운동실, 음악실, 옥상 테라스, 손님용 방. 개인 아파트가 조금 좁아진 대신 집 전체가 넓어진 셈입니다.
규칙 하나가 이 집의 성격을 말해줍니다. 기여할 수 있을 때 기여하고, 기여할 수 없게 되면 받는 것. 이 집의 방식은 의무의 공동체가 아니라 형편의 공동체에 가깝습니다.
이 집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은 아닙니다. 1987년, 자녀를 독립시킨 스톡홀름의 중년들이 조합을 만들었습니다. 몇 해에 걸쳐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논의했고, 시가 소유한 공영주택회사와 건축가를 상대로 자신들의 설계를 관철시켰습니다. 1993년 입주할 때, 그들은 이미 6년째 서로를 아는 사이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순서는 유지됩니다. 페르드크네펜에 들어오려면 먼저 조합의 회원이 되어야 하고, 회원은 입주 전부터 공동식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밥을 같이 먹어본 다음에 이사를 결정하는 것. 공식 절차는 물론 따로 있습니다 — 조합이 후보 세입자를 추천하면 건물주인 시 공영주택회사가 심사합니다. 다만 그 서류 이전에, 예비 이웃들은 이미 같은 식탁에 앉아본 사이입니다.
집의 소유주는 스톡홀름시의 공영주택회사 파밀리에보스테더(Familjebostäder)입니다. 주민들은 세입자이고, 시의 임대주택에 살면서 공동체만 자치로 꾸립니다. '공영주택회사가 집을 소유하고, 주민이 공동체를 꾸린다'는 이 방식은 스톡홀름의 다른 시니어 코하우징에서도 이미 반복되고 있습니다. 소켄스투간(44호), 둔데르바켄(61호) — 모두 같은 공영주택회사의 건물이고, 마흔 살 이상·자녀 비동거라는 같은 조건으로 '인생 후반부'의 이웃을 모읍니다.
SUOMI · 화요일 오후 2시
헬싱키 아라비안란타의 7층 집 로푸키리(Loppukiri)의 공동식사는 화요일부터 금요일, 오후 2시입니다.* 점심이라기엔 늦고 저녁이라기엔 이른 이 시간은, 하루의 한가운데를 이웃과 함께 접는 은퇴자들의 시간표입니다. 열 명 남짓의 조가 일주일씩 부엌을 맡고, 한 조의 차례는 6주에 한 번쯤 돌아옵니다. 여름 석 달은 부엌도 방학입니다.
로푸키리는 '마지막 전력질주'라는 뜻입니다. 이름부터 농담과 진심이 반반입니다. 2000년 8월, '활동적 시니어들'이라는 이름의 협회를 만든 헬싱키의 은퇴 전후 세대가 이 집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들은 스톡홀름의 페르드크네펜을 보고 왔고, 우리도 만들자고 했습니다. 이듬해 1월 시가 부지를 내주었고, 2년 뒤 협약이 맺어졌고, 2004년 늦가을 첫 삽을 떠서 2006년 4월에 완공했습니다.
결심에서 입주까지 6년 — 그동안 이들은 함께 설계안을 들여다보고, 생활 규칙을 정하고, 부엌의 동선을 논쟁했습니다.
* 2026년 공식 홈페이지 기준. 시간표는 주민 총회에서 바뀌어 왔다.
스웨덴의 집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로푸키리는 주민이 주주인 주택회사가 소유합니다. 세입자 중심이 아니라 주주 소유 중심의 공동체 — 자기 집에 직접 살 수도, 빌려줄 수도 있는 구조입니다. 58세대, 공용 공간 450제곱미터, 입주 조건은 세대당 한 사람 이상이 마흔여덟 살을 넘길 것. 시가 도운 방식도 달랐습니다 — 돈이 아니라 땅이었습니다. 헬싱키시는 시유지를 임대 부지로 배정했고, 가격규제(히타스Hitas)가 적용된 택지였기에 분양가가 눌렸습니다. 청소와 요리와 정원은 주민 몫이고, 외부에 맡기는 것은 기술 설비의 수리뿐입니다.
이 실험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같은 협회가 2015년 두 번째 집 코티사타마(Kotisatama, '모항'이라는 뜻)를 완공했고, 지금은 세 번째 집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전력질주를 마친 사람들이, 다음 주자들을 위해 트랙을 하나씩 더 깔아가는 셈입니다.
DANMARK · 442개의 마을
로푸키리가 한 채의 집으로 증명한 것을, 덴마크는 나라의 규모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2025년 집계로 확인된 덴마크의 시니어 코하우징만 442곳, 1만 2,775호. 10년 사이 거의 세 배로 늘었습니다. 그런데도 2020년 조사에서는 한 단지에 평균 서른네 명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두고 있었습니다. 열두 가구가 단층 연립에 모여 사는 시골의 작은 마을부터, 코펜하겐의 신축 단지까지 형태도 다양합니다. 흔한 것은 하나 — 함께 먹는 식당과, 입주 전에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입니다.
442개의 마을이 생긴 것은 덴마크 사람들이 유난히 사교적이어서가 아닙니다. 조사들은 오히려 반대 방향을 가리킵니다 — 외로움을 겪는 덴마크 노인이 10만 명을 넘습니다. 그런데 시니어 코하우징에 사는 노인들에게서는 높은 삶의 질과 사회관계가 보고됩니다. 그것이 코하우징 자체의 효과인지는 연구자들도 조심스럽게 남겨두지만, 정부가 움직이기에는 충분한 신호였습니다. 덴마크 정부는 2025년 11월 고령친화 사회를 논의할 국가 위원회를 출범시켰고, 12월에는 사회주택 합의를 통해 사회주택형 시니어 코하우징 확대에 5억 크로네(약 1,100억 원)를 지원하는 새 제도에 합의했습니다. 시행 법안(L18)은 이 호가 발행되는 2026년 8월 27일, 의회 3차 심의를 통과했습니다. 외로움을 개인의 사정이 아니라 나라의 일로 다루는 것입니다.
덴마크에서 시니어 코하우징을 '사회주택'으로 지으면 비용은 셋이 나눕니다. 입주자가 내는 보증금은 건설비의 2퍼센트. 지자체가 한몫(대략 10퍼센트)을 무이자로 보태고, 나머지 대부분은 장기 저당대출로 조달합니다. 이 빚의 주인은 입주자가 아니라 집을 소유한 비영리 주택회사입니다 — 상환은 입주자들이 내는 임대료로 이뤄지고, 이자의 상당 부분을 국가가 지원합니다. 그래서 입주자 개인이 지는 부담은 보증금과 다달이 내는 임대료뿐입니다. 코펜하겐시가 2020년 승인한 한 시니어 코하우징의 회의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 융자 90, 지자체 8, 입주자 2. 지자체 몫은 50년 무이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덴마크 사회주택 규정은 평균 주거면적을 계산할 때 공동식당 같은 모두의 공간을 포함할 수 있게 합니다. 함께 먹는 식당이 복지 시혜가 아니라 집의 일부라는 뜻입니다. 공동체가 제도의 예외가 아니라 제도의 문법 안에 들어와 있는 것 — 442개의 마을은 그 문법 위에 서 있습니다.
분담 비율은 주택 유형·면적에 따라 8~12%로 달라지며, 현행 차등 비율은 2026년 말까지 승인분에 적용되는 규정이다(덴마크 사회주택법 §118·§118a). 수치 출처: 덴마크 사회주택청·코펜하겐시 의회 회의록(2020)·Bolius(2025).
스웨덴과 핀란드, 그리고 덴마크의 기록 위를 걸으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건축이 아니라 순서입니다. 조합이 먼저였고, 식탁이 먼저였고, 집은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순서를 가능하게 한 것은 대단한 우정이 아니라 시간표와 당번표, 그리고 공공의 거들기였습니다.
한국에도 이 질문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명랑사회연구소도 이 질문을 그냥 지면에 두고 싶지 않습니다.
함께 늙어갈 이웃을 상상하는 독자들의 첫 모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justice_park@kakao.com으로 짧은 소개를 보내주세요.
이 특집의 모든 수치와 기록의 출처, 그리고 더 깊은 이야기 — 세 나라의 제도 비교와 효과 연구 — 는 연구소 보고서 「이웃부터 짓다」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9월 초 홈페이지(www.myeongrang.org)에 공개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2023년, 나는 서울로 7017을 자주 걸었다. 아침 7시 출근길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누군가를 위해 깨끗하게 청소하고 단정하게 가꿔놓은 길을 걷다 보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 시간에는 유난히 자주 마주치는 얼굴들이 있었다. 늘 비슷한 시간에 출근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서로 인사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익숙한 얼굴이 되었다. 어쩌면 그들도 나처럼 말없이 이 길을 걷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5월이면 장미가 피고, 한여름이면 무궁화와 수국이 길을 채웠다. 서울스퀘어와 서울역, 숭례문까지 서울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고, 누군가는 버스킹을 하고 누군가는 사진을 찍었다. 가족과 연인, 여행객, 친구들 그리고 나 같은 직장인들이 각자의 이유로 이 길을 걸었다.

한때는 직장 동료가 결혼한다면 서울로에서 야외 결혼식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만큼 나는 이 길이 좋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궁금해졌다. 나는 왜 이 길에서 위로를 받았을까…
2023년 대학원 마지막 학기에 '공간복지'라는 개념을 접했다. 공간이 사람에게 회복의 기회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흥미로웠다. 당시에는 특히 집단적 트라우마에 관심이 있었는데, 앞으로 기후변화와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개인의 힘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가 더 많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개인의 상처를 위로하는 공간에 관심을 갖다 보니, 자연스럽게 집단의 상처를 품은 공간으로 관심이 넓어졌다. 그러다 떠올린 곳이 뉴욕의 9/11 메모리얼이었다. 마침 그해 여름 미국에 갈 기회가 생겼고, 짧은 맨해튼 일정 중 9/11 메모리얼을 찾았다. 누군가는 브로드웨이처럼 화려한 관광지를 놔두고 귀신 많이 나올 것 같은 그곳에 가냐고 했지만, 이번에는 관광보다 집단적 상처를 지우지 않고 기억하고 추모하는 공간을 직접 보고 싶었다.
월드트레이드센터 지하철역에서 밖으로 나오는 순간 묵직한 기운이 느껴졌다. 귓가를 메우는 압도적인 물소리. 9/11 메모리얼에는 옛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자리에 두 개의 거대한 수조가 놓여 있다. 물은 사방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려 중앙의 깊은 빈 공간으로 사라진다. 아무리 물이 흘러도 그 공간은 채워지지 않는다. 건축가는 이를 채워질 수 없는 상실, '부재가 드러난 공간'으로 표현했다. 그 주변에는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사라진 건물의 자리를 비워두고, 그곳에 기억을 남겨놓은 공간이었다. 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9/11 메모리얼에서 조금 올라가면 하이라인 파크가 나온다. 서울로 7017의 모티브가 된 곳으로 도시의 오래된 기반시설을 사람을 위한 공간으로 바꾼 곳이다. 하이라인은 1934년부터 맨해튼 서쪽 산업지대를 오가던 고가 화물철도였다. 트럭 운송이 늘면서 1980년 운행이 중단됐지만, 시민들의 보존 노력으로 철거되지 않고 기존 구조를 활용한 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내가 하이라인에서 인상 깊게 본 것은 과거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열차가 달리던 구조와 선로를 남겨둔 채 그 사이에 식물을 심고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오래된 도시의 흔적과 새로운 삶이 한 공간에 겹쳐 있었다. 버려진 것을 없애는 대신 그 흔적을 품은 채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는 것. 나는 9/11 메모리얼이 기억을 통한 회복이라면, 하이라인은 재생을 통한 회복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맨해튼에서의 짧은 '회복의 길'을 걷고 돌아와 다시 서울로를 걸었다. 서울로 역시 한때 자동차가 달리던 고가도로였다. 1970년 차량길로 만들어진 서울역 고가는 2017년 사람을 위한 보행길인 서울로 7017로 다시 태어났다. 2023년의 나는 그저 걷고 싶어서 서울로를 걸었다. 마음이 복잡하면 걸었고, 답답한 날에도 걸었다. 9/11 메모리얼에서는 상처를 기억하는 법을, 하이라인에서는 과거의 흔적을 남긴 채 공간을 다시 살리는 법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서울로가 내 삶의 문제나 상처를 직접 해결해 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견디기 힘든 날, 잠시 숨을 고르며 걸을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었을 뿐이다. 어쩌면 회복이란 거창한 변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힘들었던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나만의 길을 걸어가는 것. 나에게 회복은 그렇게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인 것 같다.
확인: 서울역 고가 1970 완공 → 2017.5 서울로 7017 개장(서울시) · 하이라인 1934 개통·1980 운행 중단·2009~2014 공원화 · 9/11 메모리얼 「Reflecting Absence」(2011)
골프 엘보우 정복기 ①
범인은 하나가 아닙니다 — 힘줄, 삼두근, 그리고 '딸깍'하는 팔꿈치
팬데믹 이후 골프장에 사람이 늘었습니다. 야외에서 즐길 수 있는 운동이라 새로 입문한 젊은 층까지 더해져 골프 인구가 크게 늘었지요. 즐기는 사람이 많아지면 아픈 사람도 늘어나는 법 — 그중 흔한 것이 팔꿈치 안쪽 통증입니다. 흔히 '골프 엘보우(Golfer's elbow)'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팔꿈치 안쪽이 아프다고 해서 모두 골프 엘보우일까요? 이번 글에서는 그 통증이 실제로 어떤 구조에서 오는지, 골프 스윙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살펴봅니다.
골프 엘보우의 의학적 명칭은 내측상과염(內側上顆炎, medial epicondylitis)입니다. 팔꿈치 안쪽의 뼈 돌기(내측상과)에 붙는 손목·팔 근육의 힘줄 부위에 반복적인 부하가 쌓이면서 생기는 건병증(힘줄의 변성, tendinopathy)으로 이해하는 것이 요즘 의학의 관점입니다. 이름에 '염(炎)'이 들어 있지만, 단순한 염증이라기보다는 이런 순서로 오는 문제입니다.
그림 1 · 반복 부하가 통증이 되기까지 — 부하가 회복 능력을 넘어설 때 힘줄의 변화가 시작된다. (도해: 필자 원안, 편집부 재구성)
즉, 반복되는 골프 스윙으로 조직에 가해지는 부하가 회복 능력을 넘어설 때 힘줄의 변화와 통증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쉬면 낫고, 무리하면 도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팔꿈치 안쪽이 아프다고 해서 정말 내측상과에 붙은 힘줄만 문제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골프 스윙에서 쉼 없이 일하는 근육 하나를 더 봐야 합니다.
오른손잡이 골퍼의 오른팔(트레일 암)은 백스윙에서 굽혀졌다가, 다운스윙으로 넘어가며 점차 펴지고, 임팩트에 가까워질수록 최고 속도와 힘이 실립니다. 굽혀진 팔꿈치가 빠른 속도로 펴지는 이 동작 — 팔꿈치를 펴는 대표 근육이 바로 위팔 뒤쪽의 상완 삼두근(triceps brachii)입니다. 다운스윙의 팔꿈치 폄이 지나치게 빠르거나 강하게 반복된다면, 삼두근과 그 아래쪽 힘줄에도 기계적 부하가 쌓일 수 있습니다.

삼두근은 장두·외측두·내측두 세 갈래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목할 것은 안쪽 갈래인 내측 삼두근입니다. 여기서 정확히 해 둘 것이 하나 있습니다 — 삼두근의 최종 힘줄은 내측상과가 아니라 팔꿈치 뒤쪽 돌기(주두)에 붙기 때문에, "삼두근이 내측상과에 붙어 골프 엘보우를 만든다"라고 말하면 틀립니다.

다만 내측 삼두근의 아래쪽 끝은 팔꿈치 안쪽 구조물과 매우 가까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팔꿈치를 굽혔다 펼 때 이 근육이 내측상과를 넘어 움직이기도 합니다.
이 현상이 문제를 일으키는 대표 질환이 스내핑 트라이셉스 증후군(snapping triceps syndrome)입니다. 팔꿈치를 움직일 때 내측 삼두근 끝부분이 내측상과 주변을 넘나들며 '딸깍' 또는 '툭' 하는 느낌과 통증을 만드는 것인데, 팔꿈치 안쪽을 지나는 척골신경의 불안정이 함께 오기도 합니다. 환자에게는 이 모두가 그냥 '팔꿈치 안쪽 통증'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골프 후 안쪽이 아프다는 증상만으로는 힘줄인지, 삼두근인지, 신경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스내핑 트라이셉스가 골프 엘보우의 공식적인 전단계로 정의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반복되는 스윙으로 부하가 계속 쌓이고 충분히 회복되지 않는다면 통증과 기능 저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필자는 골프 엘보우가 진행된 경우뿐 아니라 증상이 본격화되기 전 단계에서 팔꿈치 부하를 관리하는 방법으로 리스파인 운동을 소개합니다. 리스파인(Respine)은 '척추를 바로 세우다(Realign one's spine)'라는 뜻으로, 근육학과 경락이론을 바탕으로 몸의 겉근육과 속근육을 함께 강화하는 운동법입니다. 정적 근지구력 운동 원리를 바탕으로 2012년 개발되어 임상 현장에서 적용하며 데이터를 쌓아왔습니다.

팔꿈치 안쪽 통증의 범인은 하나가 아닙니다. 힘줄일 수도, 삼두근일 수도, 신경일 수도 있습니다. 공통의 처방은 부하와 회복의 균형입니다.



도쿄에서 가장 높은 미술관은 사람을 이상한 순서로 만나게 한다. 엘리베이터가 도시를 지도로 만드는 동안 올라간 53층에서 기다리는 것은, 반대로 지독하게 가까운 것 — 사람의 몸이다. 론 뮤익, 일본에서는 18년 만의 대규모 개인전. 과작의 작가가 남긴 전작 마흔아홉 점 가운데 열한 점이 왔다.
첫 방부터 압도된다. 사람 키를 넘는 두개골 백 개가 방 하나를 메운 《마스》. 죽음의 기호가 백 번 반복되면 공포는 이상하게도 풍경이 된다. 관람객들은 두개골 사이를 산책하듯 걷는다. 무서운 것을 크게 만들었더니 무섭지 않게 되는 역설 — 전시의 문법이 첫 방에 요약되어 있다.
다음 방들에서 문법은 반대로 작동한다. 자기 몸집만 한 나뭇단을 끌어안고 버티는 《막대를 든 여자》는 실물보다 살짝 작다. 우리는 물러서는 대신 다가가 들여다보게 된다. 팔의 힘줄, 감은 눈, 짐의 무게. 어두운 복도 끝에 떠 있는 남자의 머리(《다크 플레이스》)도 그렇다 — 어둠이 크기를 지우자 남는 것은 고뇌에 찬 표정뿐이다.
뮤익은 실물 크기를 만들지 않는다. 실물 크기의 사람은 매일 만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커지면 물러서서 '보고', 작아지면 다가가 '들여다본다'. 감정은 디테일이 아니라 거리에서 나온다. 전시장을 나서며 이번 호 특집이 따라왔다 — 나뭇단을 혼자 진 여자와, 서로 기대어 쌓인 두개골 백 개. 삶의 무게를 혼자 지는 몸과 함께 쌓이는 몸. 어느 쪽이 우리의 노년일지는, 아직 정할 수 있는 문제다.
사진: 명랑사회연구소 — 2026.6 모리미술관 「론 뮤익」 전시 풍경 · 작품 © Ron Mueck
전시작 열한 점은 전부 '사람'이다(단 한 점, 닭이 함께 나온다). 앞 면의 《마스》·《막대를 든 여자》, 침대에 누워 근심하는 6.5미터의 여인(《인 베드》), 잡은 것인지 잡힌 것인지 모를 손목의 십대 커플(《젊은 연인》)을 빼고 — 나머지 일곱 점이 아래에 있다. JP는 이번이 일본 첫 공개라는 표시다.

날개를 달고도 날 생각이 없는 천사가 스툴에 앉아 턱을 괴었다. 초기 대표작 — 출발점인 티에폴로의 18세기 회화에서, 이 날개 달린 인물은 천사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키 2미터의 사춘기 소녀가 수영복 차림으로 벽에 붙어 시선을 피한다. 누구나 지나온 '어색한 나이'를 확대경 위에 올린 작품 — 지금 걸린 판은 2014년에 다시 조각한 것이다.

양손 가득 장바구니, 커다란 코트 안에 품은 아기. 돌봄의 무게를 실물보다 작은 몸에 눌러 담았다 — 이번 호 특집과 가장 가까운 작품.

노도 없는 낡은 목선에 벌거벗은 남자가 실려 어딘가로 간다. 행선지는 그도, 우리도 모른다. 벨라스케스 〈원죄 없는 잉태〉 속 작은 배와 연결되는 이미지다.

작가 자신의 잠든 얼굴을 네 배로 키웠다. 뒤로 돌아가면 속이 텅 빈 가면 — 극사실이 결국 만듦새임을 스스로 폭로하는 자화상이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노인과 닭이 눈을 맞추며 대치 중이다. 뮤익식 유머의 정점 — 웃기고, 어딘가 서글프다.

어두운 방 — 관람객은 문턱에 머문다. 어둠 속에 고뇌에 찬 중년 남자의 얼굴이 떠 있다. 자화상으로 시작했지만, 작가는 참고사진을 찍던 남자의 표정에 매료돼 그를 모델로 삼았다. 크기를 지운 어둠이, 감정만 남겨 놓는다.
사진: 명랑사회연구소 — 2026.6 모리미술관 「론 뮤익」 전시 풍경 · 작품 © Ron Mueck · 연도는 모리미술관 작품 리스트, 한글 작품명은 국립현대미술관(2025) 표기 기준
지난 호의 국립신미술관이 초록 사이에 눕힌 수평의 파도였다면, 이번 호 미술기행의 무대는 정반대다. 모리미술관은 지상 238미터, 54층 타워의 53층에 있다. 미술관에 '들어간다'가 아니라 '올라간다'고 말해야 하는 곳 — 도심의 하늘에 매달린 화이트큐브다.
이 수직의 발상은 롯폰기 힐스라는 재개발의 정점이다. 개발자 모리 미노루(1934-2012)는 사무실과 집, 상점과 문화가 한 단지 안에 겹쳐 사는 도시 — 출퇴근이 사라진 도시를 그렸고, 구상에서 완공까지 17년이 걸렸다. 400여 필지의 땅을 모아 2003년에 문을 연 이 언덕의 콘셉트가 '문화도심(文化都心)'. 그 선언이 가장 급진적으로 드러난 자리가 타워의 꼭대기다. 가장 비싼 최상층을 사무실도 전망대도 아닌 미술관에 내주었다 — 문화가 도시의 정점이라는 뜻을, 건물의 단면도로 써 버린 것이다.
타워는 KPF의 윌리엄 페더슨이, 미술관 내부는 뉴욕의 미술관 전문 건축가 리처드 글럭먼이 설계했다. 산책은 지상에서 시작된다 — 타워 발치에 세워 둔 유리 원뿔 '뮤지엄 콘'으로 들어가, 전용 엘리베이터로 단숨에 53층. 문이 열리면 5개 층 높이의 아트리움이 솟아 있고, 전시실을 빠져나오면 한 층 아래 52층의 전망대 '도쿄 시티 뷰'가 이어진다.
그래서 이 미술관의 마지막 작품은 언제나 도쿄다. 이번 호처럼 론 뮤익의 거대한 두개골들을 보고 나와 창가에 서면, 발밑에 실물 크기의 도시가 끝없이 펼쳐진다 — 방금까지 크기를 의심하던 눈에는 그 '실물 크기'가 가장 낯설다. 전시를 담는 그릇이 도시 전체를 액자에 담아 관람의 마침표로 내놓는 셈이다.


지난 회, 우리는 바흐가 자기 이름 네 철자(B-A-C-H)로 서명하는 법을 배웠다. 규칙 복습 — 독일식 음이름에서 A부터 G까지는 그대로 음이 되고, B는 시♭, H는 시, Es(=S)는 미♭, As는 라♭. 음이 안 되는 철자는 조용히 건너뛴다. 그런데 이 규칙의 진짜 용도는 자기 서명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차마 부르지 못하는 이름 — 연인의 이름을 밀봉하는 데, 이 암호는 더 자주 쓰였다.
로베르트 슈만은 이 놀이의 최고 중독자였다. 데뷔작인 「아베크 변주곡」(Op.1)부터가 암호다 — 무도회에서 만난 메타 아베크(Abegg) 양의 이름 그대로 라-시♭-미-솔-솔(A-B-E-G-G) 주제로 변주곡을 썼다.
압권은 「카니발」(Op.9)이다. 당시 약혼자였던 에르네스티네의 고향 마을 아슈(Asch)의 철자를 음으로 바꿔 스물한 곡 전체를 지었는데, 재미있게도 이 네 철자는 자기 이름 Schumann 안에도 전부 들어 있다. 운명이라 여겼을 만하다. 슈만은 한술 더 떠 「스핑크스」라는 악장에 이 암호 음들만 덩그러니 적어 두었다 — 연주하지 말고 풀어 보라는 듯이.
정작 그는 몇 해 뒤 에르네스티네가 아니라 클라라와 결혼한다. 스물한 곡의 변주 속에 밀봉된 마을 이름만 남기고.
브람스는 가곡을 함께 부르던 아가테 폰 지볼트와 반지까지 나눴다가 파혼했다. 그리고 몇 해 뒤, 현악 6중주 2번(Op.36) 1악장 한복판에 그녀의 이름을 적어 넣는다 — 라-솔-라-시-미, A-G-A-(T)-H-E. 음이 없는 철자 T만 조용히 건너뛴 채. 브람스는 친구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나는 나의 마지막 사랑에서 나 자신을 풀어놓았다." 사과도 편지도 아닌, 여섯 대의 현악기로 쓴 작별 인사다.
슈만이 사랑의 설렘을 스물한 곡으로 변주했다면, 브람스는 이별의 마침표를 다섯 음으로 찍었다. 같은 규칙, 정반대의 용도였던 이 암호가 수백 년을 살아남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법은 하나인데, 담을 수 있는 마음은 전부이기 때문이다.
규칙 A~G는 그대로, B=시♭ · H=시 · S(Es)=미♭ · As=라♭ · 나머지 철자는 건너뛴다
참고: 슈만 「아베크 변주곡」 Op.1 · 「카니발」 Op.9 · 브람스 현악 6중주 2번 Op.36. 브람스의 말은 전기 작가들의 기록으로 전해진다.
만년필은 쓰는 일을 참 수고롭게 만드는 물건이다. 쓰려면 캡을 열어야 하고, 잉크부터 채워야 한다. 그런데도 자꾸 만년필을 찾게 되는 건, 쓰는 일이 수고로울수록 신중하게 쓰게 되기 때문이다. 손가락 끝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디지트(digit)의 세상과 달리, 만년필은 필압 하나에도 획이 달라진다 — 내 생각이 문장이 되는 과정을, 이 물건은 꽤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일기만은 만년필을 고집한다. 내 이야기니까. 가볍게 키보드를 두드려 적어 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나의 하루니까. 그렇게 정성스럽게 잉크를 채워 가며 나를 기록한다. 물론 그렇게 쓴 일기에 무슨 품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태반은 오늘 하루 나를 괴롭힌 사람에 대한 욕이고, 기분이 좋은 날엔 거드럭거리는 자화자찬 일색인 그저 그런 것일 뿐이다.
그런 일기에 어울리는 펜을 서랍에서 한 자루만 고른다면 이것이다! 몽블랑이 1992년부터 매년 문학가를 기려 선보여 온 작가 에디션(Writers Edition)의 2012년, 조너선 스위프트다. 검은 래커 몸통을 휘감은 은빛 다층 인레이는 소인국 사람들이 걸리버를 묶었던 밧줄이고, 캡은 18세기의 삼각모(三角帽)다. 클립은 걸리버 곁에 세운 단상으로 오르던 사다리에서 왔고, 펜촉에는 거인의 다리 사이로 행진하는 소인국 군대가 새겨져 있다. 묶어도 묶이지 않는 사람 — 펜 한 자루가 통째로 풍자다.
욕과 자화자찬의 일기에 이보다 잘 맞는 증인은 없다. 스위프트는 영어 문학을 대표하는 가장 날카로운 풍자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 『걸리버 여행기』도, 아기를 먹자고 풍자적으로 제안한 「겸손한 제안」도 그 칼날의 산물이다 — 동시에 지독한 일기의 사람이었다. 1710년부터 1713년까지, 그는 런던의 하루하루를 일기 같은 편지에 적어 더블린의 에스터 존슨 — 훗날 '스텔라'라 불린 — 과 리베카 딩글리에게 보냈다. 사후에 『스텔라에게 보내는 일기』로 묶인 그 기록에는 그날의 불평과 험담, 정치 이야기와 애정 어린 잡담이 거리낌 없이 뒤섞여 있다. 위대한 풍자가의 사적인 기록조차 이렇게 시시콜콜하고 솔직했다는 것 — 이만하면 내 일기의 품격에도 훌륭한 선례가 있는 셈이다. 이번에 나온 연구소 소논문의 증정사도, 이 펜으로 눌러 썼다.




출처: 몽블랑 작가 에디션 연혁(Follow My Pen · Inkstable) · 스위프트 에디션 디자인(Classic Driver, 2012) · 『스텔라에게 보내는 일기』(1710–1713 서한, 사후 출간)
더위가 길어지면 입맛이 제일 먼저 달아난다. 이번 달의 답은 여름의 붉은 채소, 토마토 — 무치고, 재우고, 굽고, 끓이는 다섯 접시의 실험 기록.
재료 토마토 4개, 영양부추 한 줌, 양파 1/4개 · 양념 고춧가루 3T, 매실액 2T, 까나리액젓 2T, 소금과 다진 마늘 약간

재료 방울토마토 한 통, 적양파 반 개, 바질잎 3~4장, 올리브오일 3T, 화이트발사믹 1T, 레몬즙 1T, 소금과 후추 약간씩

재료 토마토 4개, 양파 1/4개, 다진 마늘 약간, 다진 쇠고기 200g, 빵가루 1/3컵, 소금과 후추 약간씩, 모짜렐라치즈 1컵 (집에 있는 다른 야채나 버섯을 함께 넣어도 좋다)

재료 토마토 1개, 올리브오일, 레몬즙, 꿀, 소금 약간

재료 쇠고기 안심 300g, 감자 2개, 당근 1/3개, 양송이버섯 5개, 브로콜리 반 개, 토마토홀 통조림 1통, 토마토 페이스트 반 통, 토마토 소스 1컵, 월계수잎 2장, 페퍼론치노와 다진 마늘 약간, 치킨스톡 1개, 소금과 올리고당 약간


여기까지 다 만들었다면, 남은 토마토로는 토마토 달걀볶음과 카프레제 샐러드도 만들어 먹어요. 팬 하나, 접시 하나면 끝나는 여름의 마무리.


휴가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입추가 지났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 — 반가운 계절이지만 피부에는 이때가 고비다. 땀의 계절이 물러나면서 피부는 속과 겉이 함께, 급격하게 마르기 시작한다. 가을에도 윤기를 지키는 열쇠는 지금부터 피부에 '마를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풍성한 거품은 시원하지만, 과도한 계면활성제는 피부 장벽을 무너뜨려 건조를 부르는 주범이다. 거품 많은 세안제는 잠시 내려놓고, 천연 보호막을 지켜 주는 저자극·마일드 제형으로 바꾼다. 건조는 세면대에서부터 차단하는 것이 순서다.
어떤 고가의 기능성 제품보다 지금 피부에 시급한 것은 수분과 보습이다. 세안 직후, 비어 있는 피부 속부터 수분 앰플로 촘촘히 채운다. 그 위에 보습막을 겹겹이 쌓아 하루의 방어선을 만든다.
화이트닝·링클 같은 기능성 제품은 시간대를 나누어 쓰는 편이 효과적이다. 그리고 여름의 막바지 — 계절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피부는, 오늘 시작하는 탄탄한 수분 루틴에서 나온다.

수분·보습 집중. 화장 밀림을 막고 하루 종일 촉촉함을 유지한다.
기능성 집중. 피부가 쉬는 밤에 화이트닝·링클·탄력 케어를 적극적으로.
제20회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이 오는 9월 19일 개막한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대회에서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스포츠클라이밍은 리드, 볼더, 스피드 3개 종목에 총 6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다. 9월 29일 남자 볼더 준결승을 시작으로 펼쳐질 클라이밍 경기를 더욱 재미있게 즐기기 위해 이것만은 알고 보자.
자연 암벽에 오르는 것처럼 하네스(안전벨트)를 착용하고, 로프를 걸면서 15미터 정도의 벽에 설치된 홀드를 잡으며 오른다. 흔히 '클라이밍'이라 하면 떠올리는 바로 그 종목이다. 일반 대회에서는 예선전 2개 루트의 결과에 따라 24명이 준결승을 치러 상위 8명이 결승을 진행한다. 그러나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는 2025 서울 세계선수권과 2026 메이샨 아시아선수권 성적으로 출전권을 확보한 선수들이(국가·성별당 최대 2명) 준결승부터 경기를 시작한다. 등반 시간은 6분이며, 제한시간 내 가장 높은 홀드를 제어(통제)한 선수가 승리한다. 결승에서 동률이 나오면 준결승 순위가 높은 선수가 우승하는 카운트백(Countback) 방식을 적용하며, 카운트백까지 동률이면 최종 홀드에 먼저 도달한 시간으로 승부를 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자부 이도현(세계랭킹 3위), 노현승(17위), 여자부 서채현(1위), 김채영(12위) 선수가 출전한다. 서채현과 이도현은 강력한 금메달 후보이며, 김채영 선수도 메달권을 노려볼 실력이다. 여자부에서는 일본의 리드 절대 강자 모리 아이와 중국의 장웨퉁이 서채현과 경쟁할 예정이며, 남자부에서는 일본의 스즈키 네오, 요시다 사토네, 인도네시아의 푸트라 트리 라마다니가 이도현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것이다.

볼더링은 최대 4m의 벽에 출제된 문제를 가장 적은 시도로 해결하는 등반 경기이다. 보통 예선전은 5개, 준결승·결승전은 4개의 루트가 세팅되며, 루트당 4분이 주어진다. 루트를 완등하면 25점, 문제의 중간 즈음 루트 세터(문제 출제자)가 지정한 존 홀드(Zone Hold)를 사용하면 10점을 획득한다. 이때 시도 횟수에 따라 0.1점씩 차감한다. 한 번 만에 완등하면 25점, 두 번 만에 완등하면 24.9점이 되는 식이다. 첫 시도에 존 홀드까지만 도달하면 10점, 두 번째에 존 홀드를 사용하면 9.9점이다.
남자 볼더링에서는 일본 선수들이 세계적인 수준을 보이고 있으며, 절대 강자인 안라쿠 소라토와 나라사키 토모아가 출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세계랭킹 2위인 이도현 선수와 최근 다시 폼이 올라온 천종원 선수가 메달 대결을 펼칠 예정이다. 여자부에서는 서채현과 노희주 선수가 일본의 노나카 미호, 모리 아이, 중국의 장웨퉁과 경쟁하게 될 것이다.

스피드 클라이밍은 높이 15미터, 5도 기울어진 벽에서 동일하게 규격화된 루트를 누가 더 빨리 오르는지 다투는 '벽 위의 100m 육상' 경기이다. 아시안게임은 박진감을 더하기 위해 2개가 아닌 4개 레인으로 경기를 치른다. 남자 20명, 여자 19명이 2번씩 등반해 더 빠른 기록으로 상위 16명이 결선에 진출하며, 결선은 토너먼트 방식이라 단 한 번의 실수가 탈락과 직결된다. 세계 기록은 남자 4.54초(자오이청, 2026년 5월), 여자 5.99초(에마 헌트, 2026년 7월) — 1/100초 차이로 승부가 갈리는 극적인 재미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자부 김동준, 조진용 선수가 스피드 강자인 인도네시아와 중국에 도전하며, 여자부에서는 정지민(세계랭킹 5위)과 성한아름 선수가 메달을 노릴 예정이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국가대표 선수들의 선전을 기원한다. 그리고 생각보다 진입장벽이 높지 않은 생활 스포츠이므로 근처 실내 클라이밍장에서 체험이라도 해보길 바란다.
참고: 월드클라이밍(국제연맹, 舊 IFSC) worldclimbing.com · youtube.com/@worldclimbing · 대한산악연맹 kaf.or.kr · 세계랭킹·기록은 2026.8.27 확인 기준
땅 위에서 휠체어 바퀴에 의지해 살아갑니다. 계단 하나, 작은 턱 하나에도 세상은 종종 거대한 벽이 되곤 합니다. 장애인 스포츠라 하면 흔히 실내 체육관이나 트랙을 먼저 떠올리시곤 합니다. 저 역시 얼음판 위에서 컬링 스톤을 밀어내며 한계에 도전해 왔습니다.
하지만 제 가슴 한구석에는 늘 더 넓은 세상에 대한 갈증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종 그 갈증 해소를 위해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 있는 산으로 향합니다.
휠체어 패러글라이딩은 결코 혼자서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닙니다. 이륙 순간 휠체어의 중심을 잡아주고 바람을 읽어줄 동료 파일럿들, 여러 조력자들의 손길과 어시스턴트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땅 위에서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이동 격차가 존재하지만, 활공장에서 이륙 후 날아오르면 하늘의 바람은 모두에게 똑같이 불어옵니다. 하늘 위에서는 휠체어도, 장애도, 중력의 무게도 모두 평등해집니다.

제가 도전하려는 목표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다시피 한, 휠체어 파일럿을 위한 국제 패러글라이딩 대회입니다. 국내 활공장을 넘어 세계적인 기류와 험준한 산맥이 펼쳐진 콜롬비아의 하늘을 휠체어하네스에 앉아 비행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엄청난 도전입니다.
휠체어 파일럿에게 특화된 안전 장비와 착지 시스템 적응 점검, 장거리 비행을 위한 육체적·정신적 트레이닝, 현지 기류에 적응하기 위한 전략 기획,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안전하고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기 위한 스폰서십 홍보 유치까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과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콜롬비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려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장애인 스포츠가 정해진 규격의 체육관에만 갇혀 있지 않다는 것, 중증 장애인이라도 높은 하늘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장애인 선수가 세계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열정과 노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선수용 특수 휠체어 장비 보강, 항공 및 현지 체류 비용, 안전 어시스턴트 인력 운용 등 현실적인 후원과 관심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저의 콜롬비아 대회 도전은 개인의 이력을 위한 비행이 아닙니다. 거친 바람을 뚫고 하늘을 나는 제 모습이, 땅 위에서 수많은 제약과 싸우고 있는 수많은 장애인들과 그 가족들에게 "머릿속, 마음속 제한을 깨고 우리도 날아오를 수 있다"는 명랑한 희망의 신호가 되기를 원합니다. 콜롬비아의 푸른 하늘 아래, 대한민국 휠체어 패러글라이더의 날개가 펼쳐질 수 있도록 여러분이 따뜻한 바람이 되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와 동료 파일럿 박경영은 그 응원을 날개에 얹고 끝까지 멋지게 비행하겠습니다.
비행 영상 보기확인: Wheels4Flying — 이동이 제한된 사람들의 패러글라이딩을 지원하는 국제 비영리 조직, 콜롬비아 바예델카우카 피에데친체에서 국제 휠체어 패러글라이딩 밋업 개최(wheels4flying.com) · 이재학 — 제22회 전국장애인동계체육대회(2025.2, 강릉) 휠체어컬링 우승팀 경남(창원시청)
연구소의 책상 위에는 지금 네 개의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가 — 자동화의 시대, 기본소득이라는 오래된 새 질문. 예술은 누구의 것인가 — 향유의 문턱과 그 문턱을 넘는 사람들. 예술로 먹고살 수 있는가 — 예술인 고용보험 5년의 성적표. 그리고 이번 호가 남긴 질문, 우리도 이웃부터 지을 수 있는가 — 한국의 코하우징 실험들을 찾아가는, 이번 특집의 답편. 어느 질문이 9월의 특집이 될지는, 여름이 끝나기 전에 정해집니다. 좋은 질문을 알고 계신 분은 언제든 연구소로 보내 주세요 — justice_park@kakao.com
3회로 여정을 마친 「일본 미술기행」의 자리에, 이번에는 우리 동네의 미술관들이 들어옵니다. 발행인이 7월에 방문한 세 전시 — 물방울의 김창열(평창동 김창열 화가의 집), 큐비스트들(퐁피두센터 한화 서울), 산의 화가 유영국(서울시립미술관) — 를 9월호부터 한 편씩 안내합니다. 스눕독의 여행기 ②(보스턴·하버드)와 가을 환절기의 명랑 뷰티, 집밥연구소·명랑음악당도 어김없이 돌아옵니다.